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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언어

아나빔(‎עֲנָוִ֥ים)과 프라우스(πραεῖς / πραΰς)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 개정개역)


겸손한 사람들이 오히려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시37:11 새번역)



예수의 설교, 혹은 연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또 사랑 받는 것은 아마도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소위 "산상수훈(Sermon on the Mountain)"일 것이다. 이 산상수훈은 "8복"이라고 불리는, 8차례의 복 선언으로 시작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등으로 시작되는 복 선언은, 복 있는 자는 어떠하다는 통념을 뒤집기 때문에 충격과 감동을 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여러 학자와 설교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특히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에서 이 "온유한 자"가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분석해 보고자 한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온유(溫柔)하다'의 의미는 '성격,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라고 한다. 그래서 흔히 '온유한 사람'이라면 태도가 나긋나긋하고 화를 잘 내지 않으며 유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성격이 온화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온유하다고 표현한 사람은 모세(민12:3)와 예수(마11:29) 두 명이다. 먼저 모세를 온유하다고 표현한 민수기 본문의 경우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해 불평하는 장면에서 나오는 문장인데, 다소 맥락을 깨뜨리는 돌출적인 문장으로, 화자가 누구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예수의 경우 자신을 가리켜 한 말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스스로 유순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다른 본문들을 보면 모세와 예수가 성격이 그리 온순하고 부드러운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온유함'이 어떤 의미인지, 성경의 원문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마태복음 5장 5절은 신약성경에 속하기 때문에 원문은 헬라어(그리스어)다. 그런데, 이 마태복음 5장 5절은 예수의 독창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구약에서 인용한 표현으로, 출처는 시편 37편 11절로 볼 수 있다(다른 본문에도 비슷한 표현들이 있다). 개역개정에서 마태복음 5장 5절과 시편 37편 11절에서 모두 '온유한 자'로 표현한 단어는, 헬라어 신약성서와 70인역(LXX) 구약성서에서는 프라에이스(πραεῖς), 원형으로 프라우스(πραΰς)로 표현했고, 히브리어로는 아나빔(עֲנָוִ֥י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원문에서 사용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야 '온유함'의 원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 시편 37편 11절의 '아나빔'의 의미


먼저 아나빔이라는 단어는 아나브(עָנָו)라는 단어의 복수형으로서, 히브리어 사전 BDB (The Brown-Driver-Briggs Hebrew and English Lexicon)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poor), 고통 받는 사람(afflicted), 겸손한 사람(humble), 온순한/온화한 사람(meek)' 등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히브리어 사전인 HALOT (The Hebrew and Aramaic Lexicon of the Old Testament)는 아나빔의 원형이 아나브가 아닌 아니(עָנִי)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때 이 아니 역시 '가난한, 고통 받는'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면서 '아'소리가 나는 첫 글자 히브리어 알파벳 '아인(עָ)'이 '절하는 행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이 단어가 '절하는 자'라는 의미와 관련 있다고 한다. TWOT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T)는 이 두 단어가 흔히 혼용된다고 보고, 특히 이사야는 두 단어의 의미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나빔이라는 단어가 결국 명사로 사용되지만, 어원을 따져보면 동사로 볼 수 있다. 아나빔의 어원이 되는 동사 아나(עָנָה)는 남을 '압제하다, 힘들게 하다'는 의미다.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이 자신의 적을 굴복시킨다는 맥락(신26:6)이나 사래가 하갈을 학대했을 때(창16:6)에서 사용된다(TWOT). 하나님은 이러한 징벌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많은 고통을 겪고 나면 모세처럼 '온유한 자'가 된다(민12:3).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통, 즉 연단을 겪고 난 사람은 온유해지고 겸손해 진다. 이는 태생적으로 유순하고 착한 성품을 지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훈련을 받은 결과 성품이 다듬어 진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TWOT의 설명은 온유함이 태생적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결과라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인생의 풍파를 겪고 난 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나이 많은 현자의 부드러운 태도를 온유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젊은 예수의 온유함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사야 61장 1절에서도 이 '아나빔'이 등장한다. 이 단어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두 '가난한 자'로 번역했고, 영역 가운데 NRSV는 'the oppressed(압제 받는 사람들)'로, ESV는 'the poor(가난한 사람들)'로, NASB는 the afflicted(고통 받는 사람들)'로 옮겼다. 이사야 본문에서 아나빔에게는 '아름다운 소식' 즉 good news (세 영역 공통)가 전달될 것이다. 시편 37장 11절에서 아나빔은 '땅(에레츠)'을 차지(혹은 기업으로 물려 받음)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61장 본문에서의 아나빔에게 전해지는 좋은 소식 역시 땅을 받는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사61:7, 11 참고). 그렇다면 이사야 61장의 아나빔을 '온유한 사람들'로 번역해도 될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시편 37장의 아나빔을 '가난한 사람들, 압제 받는 사람들'로 번역해도 될까?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이 논의를 위해 먼저 아나빔에게 가해지는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가난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고통과 고난을 베푼다는 생각은 주위에 매우 흔하고도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징계의 수단, 혹은 심판으로서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먼저 약속하신 것은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형통(prosperity)하기를 바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사의 모든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기 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타인을 '압제'함으로써 '고통'을 가하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실제로 시편 37편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면서 악인의 멸망을 탄원하고 있다. 시편 37편의 아나빔이 겪는 고통은 하나님 때문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빔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아나빔은 악인의 횡행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아나빔은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않는다(시37:1).'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며,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않는다(시37:7).' 왜 그렇게 하는가?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악을 만들기 때문이다(시37:8).' 아나빔의 믿음은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할 것(시37:9)'이다. 이는 로마서 12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한 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선언과 같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모세를 가난한 사람, 압제 당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하나님과 대면한 선지자가 가난한 사람이었던가? 대답은 그렇다. 모세는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로서, 민족이 당한 모든 수난과 압제를 한 몸으로 받아낸 인물이었다. 애굽의 압제에 대항한 모세의 반응은 시편 37편의 그것과 동일하다. 오히려 악을 만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악인을 소멸하실 때까지 압제를 견디며 기다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길을 내어드렸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할 수 있었다. 광야에서 지내는 40년 동안 모세는 여러차례 백성들의 반란 및 반항에 직면했음에도 한 번도 백성들을 직접 저주하거나 처벌할 것을 탄원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며 중보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시편 37편과 모세의 경우를 볼 때 '온유함'의 핵심은 곧 '고통과 압제를 당하나 직접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이사야 61장에 적용해 보아도 동일하다. 이사야 61장의 아나빔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면서 땅을 잃었고, 바벨론 포로 생활을 겪으면서 민족의 모든 존엄성과 자부심을 잃었다.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바벨론 '제국'이라는 거대한 악으로부터 압제를 당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가난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이들이 곧 '마음이 상한 자'이며, '포로된 자', '갇힌 자'로서, 마태복음 5장 3절의 '심령이 가난한 자', 4절의 '애통하는 자', 그리고 5절의 '온유한 자'다. 이들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악인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았다. 바벨론의 모든 죄악을 인내하며 기다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페르시아를 통해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고국으로 돌려보내실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들에게 선포된 것이 바로 '아름다운 소식'이었다.




2. 마태복음 5장 5절의 헬라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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